sentiments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창천(蒼天) 2004. 12. 26. 23:23

아들아, 새벽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전화 한 번 없는 너를 기다리며 나는 지금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분노를 느끼며 이 글을 쓴다. 이 짧은 글을 마치기 전에 대문에 벨소리가 나고 네가 돌아오기를 나는 바란다. 하루 종일 집안일에 시달린 너의 어머니도 아직 잠들지 못하고 있다.

너는 재미도 없고 신명이 날 리도 없는 국어 · 영어 ·수학에 주눅들려 노예만도 못한 고등학교 시절과 재수 시절을 거쳐서 겨우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너의 젊은 몸의 생명력은, 국 ·영 ·수로 너의 정신을 옥죄고 경쟁과 싸움으로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어버린 어른들의 제도보다 힘센 것이어서, 너의 몸은 청년의 건장함으로 자라났다. 지난번 이삿짐을 나를 때도 너는 이미 아버지보다 훨씬힘이 좋았다. 그리고 너는 징병 신체검사에서 현역복무 판정을 받았고, 이제 입영 명령을 기다ㅏ리고 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나 국회의원, 장관, 그리고 온갖 돈많고 권세 높은 댁 도련님들이 무슨 사유에서인지 관행적으로 병역을 면제받아 왔다는 신문기사를 매일같이 눈독 들여 읽고있는 너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사실 네가 그 문제를 나에게 묻지 않기를 바랐다. 아마도 그 참담함은 이 나라의 무수한 힘없는 아버지들의 참담함이었을터이다.

내가 아들인 너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던 어느 날, 너는 결국 너의 그 별것도 아닌 평발 증세를 너의 어머니께 강조하면서 재심받을 방법을 찾아달라고 말했다. 너와 너의 어머니는 다만 무력하게 한숨을 쉴 뿐 아무런 대답도 해줄 수가 없었다. 너를 낳아서 청년이 되도로고 길렀으며, 남자로 태어나 함께 병역의 의무를 진 내가 너에게 이 사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나라의 어느 아버지가 징집을 앞둔 아들에게 이 사태를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가장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네가 네 또래 녀석들과 어느 음습한 술집 골목이나 헤매면서 분노와 혼란의 풋술을 마시고 있을 이 새벽에, 나는 너의 교육과정과 너의 사회적 성년식과도 같은 입대 예비과정에서 이 나라의 제도와 사회, 그리고 남 앞에서 애국적 언동을 해보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권세 높은 자들이 너의 그 짧은 생애에 가한 상처와 모욕을 생각하면서 잠들지 못한다.

너에게 할 말은 아니다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면서 나는 너를 기르던 세월 속에서 내가 치러야 했던 가혹한 노동과 날이 밝도록 일해야 했던 수많은 밤의 고난을 생각했다. 세금을 원천징수당하고, 34개월의 병역을 치르고, 예비군 · 민방위 훈련에 참가하고, 교통규칙을 지키고, 전기를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고……, 시간외 노동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나라가 시키는 대로 끝까지 머리 숙여 모든 일을 다해온 세월은, 지금 견딜 수 없이 허망하다.

나라를 지키는 일은, 아버지 세대가 늙으면 아들 세대가 물려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인(私人)인 아버지가 사인인 아들에게 넘겨주는 의무가 아니다. 그것은 공적(公的) 아버지와 국가와 국민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 너희들의 그 울분에 찬 새벽 술자리에 공사간에 어느 아비가 끼어들 수 있겠느냐. 아들아, 나는 겨우 이렇게 말하려 한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못난 나라의 못남 속에서 결국 살아내야 한다는 운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나라의 쪽박을 깨지 않는 일이라고. 너의 의무는 몇몇 비굴한 이탈자들에 의하여 신성이 모독되었지만, 송두리째 부정당한 것은 아니라고.

너의 어머니에게 다시는 너의 평발을 내밀지 말아라. 아프고 괴롭겠지만, 나라의 더 큰 운명을 긍정하는 사내가 되거라. 네가 긍정해야 할 나라의 운명은 너와 동년배인 동족 청년과 대치하는 전선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가서, 대통령보다도 국회의원보다도, 그리고 애국을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도 더 진실한 병장이 되어라.

<'김훈 世說 :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말들에 대하여' 中 '아들아, 다시는 평발을 내밀지 마라'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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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으면서 뭐라고 해야하나...

답답한 그 무언가... 울분이랄까... 후회랄까... 실망이랄까...

여튼 확실히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었고, 지금도 그 때의 내 결정이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동생이 군대간다고 결정했던 그 때 역시 찬성쪽은 아니었고, 앞으로 내 자식이 생길 경우에도 그다지 권장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는 않지만, 최소한 건드리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원래 진정한 태평성대는 왕도 모르는 그 때라 했다.

이건... 너무 시끄럽고... 너무 귀찮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님의 이 책은 가려운 곳... 박박 긁어주신다. --;